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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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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HOLE(블랙홀) - 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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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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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isc
제조국
: 한국

음반정보

BLACK HOLE(블랙홀) - EVOLUTION

과거와 현재를 해체하며 미래로 내달리다.
정규 9집

30년의 무게


데뷔 음반 [Miracle](1989)이 발매된 지 30년이 지났다. 헤비메탈 밴드 블랙홀은 그 30년 동안 쉼 없이 무대에 올랐다. 한 해도 쉬지 않고 단독공연을 만들었고, 후배 밴드들과 어우러지는 무대라면 어디든 달려가 함께 연주해왔다. 그래서 공연장을 자주 찾는 팬이라면 블랙홀의 이번 앨범 [Evolution]이 무려 14년 만에 선보인 정규작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놀라울지도 모른다. 그 사이 디지털 EP [Living in 2008](2008), [Living in 2009](2009), 블랙신드롬, 디아블로, 이현석과 함께 한 옴니버스 라이브 앨범 [Metal Honey](2012), 기획앨범 [Hope](2014) 외에도 여러 디지털 싱글을 발표해왔기에 더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다. 허나 [Evolution]은 2006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록 음반과 노래 부문을 모두 휩쓴 [Hero](2005) 이후 블랙홀이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정규앨범이다.
다른 장르의 음악인에게도 그렇지만 하드록과 헤비메탈 밴드에게 있어 정규앨범이 가지는 무게는 특히 무겁고 중요하다. 아예 앨범 단위로만 작품 활동을 했던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유기적인 곡 구성으로 앨범 단위로 완결되는 컨셉을 담았던 러쉬(Rush), 앨범 단위로 사운드와 작법을 바꿔가며 헤비메탈의 판도를 새로 쓴 메탈리카(Metallica), 연작 컨셉 앨범으로 유러피언 헤비메탈의 역사를 새로 쓴 헬로윈(Helloween), 앨범 마다 사운드의 극한점을 새로 만든 툴(Tool)에 이르기까지 이 시끄러운 음악의 역사는 정규앨범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블랙홀 역시 다르지 않다.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명작 [Made in Korea](1995), [City Life Story](1996)은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과 이를 구현하는 사운드 모두에서 앨범 단위의 집중력과 혁신을 일궈냈다. 또한 새 앨범을 준비할 때마다 음반에 담기는 사운드의 질적 성장을 위하여 7집 [Seven Sign](2000), 8집 [Hero]에서 곤도 게이지(Kondo Keiji)나 빅토르 스몰스키(Victor Smolsky)와 같은 해외 엔지니어와 프로듀서를 초빙해 끊임없이 사운드를 벼려왔다.

14년만의 정규앨범 [Evolution]

밴드의 음악적 정체성이자 현재와 미래의 방향성을 드러내는 정규앨범. [Evolution]은 과연 어떤 앨범일까, 이 앨범을 통해 블랙홀은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 것일까. 우선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부터 태도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작품과 확연히 달라졌음이 눈에 들어온다. 동학에서 광주민주화항쟁까지 누군가 덮으려 했던 아픔과 저항의 역사를 되짚거나, 현재 한국사회가 마주한 갈등과 문제를 날카롭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노래했던 블랙홀의 모습만을 기억하는 팬들에게는 당혹스러울 정도다. [Evolution]은 미래의 변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이제 막 시작된 혹은 근미래에 펼쳐질 수 있는 물질문화의 급격한 변동과 그에 따른 인간의 삶의 형태와 가치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상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도 희망적이고 유쾌한 톤으로. 물론 인류의 정신문화가 물질과 과학기술에 종속되어 버릴지 모른다는 위험성에 대해 잊지 않고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앨범 전체를 감싸고 있는 밝고 긍정적인 정서를 걷어낼 수준은 아니다.
이러한 변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가사가 아니라 사운드의 변화다. 5, 6분대의 시간동안 웅장하고 복잡한 악곡 변화를 추구하던 과거의 블랙홀과 달리 전곡이 3분대의 간결하고 압축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다. 블랙홀 특유의 대곡 지향 비장미가 사라졌다고 실망하긴 이르다. 단단하면서 섬세한 연주가 제공하는 쾌감이 귓가에 오래 남는 음악을 앨범 가득 담아냈기 때문이다. 한 두 개의 리프를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미니멀한 구성미를 만들었고, 담담하게 강력한 연주력을 풀어낸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리더 주상균은 미래 산업이 현재보다 훨씬 단순하면서도 하이 테크놀로지가 직관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 착안한 음악이라 설명한다. 일견 간결하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고도의 연주 기술과 멤버 사이의 음악적 합일이 이뤄져야 가능한 사운드가 탄생했다.

기초부터 다시 쌓은 미래의 사운드

우선 앨범 전체를 압도하는 드럼 사운드부터 살펴보자. 정교한 터치로 잘 알려진 이관욱이지만 이번에는 킥과 플로어 탐이 만드는 저음의 파워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데 주안점을 둔 연주를 펼친다. 드럼 터치 하나하나의 강약 조절과 뉘앙스가 온전히 전달되도록 수없는 리허설과 재녹음 과정을 거쳐 탄생한 사운드다. 밴드는 힙합이나 일렉트로닉 계열의 음악에서 들을 수 있는 샘플링과 전자음으로 만든 엄청난 압력의 저음과 비교하더라도 손색없는 무게감과 타격감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드럼 레코딩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산뜻하고 간결한 리프와 악곡에도 불구하고 묵직하게 느껴지는 사운드의 비밀은 바로 심혈을 기울인 드럼 연주와 레코딩, 믹싱의 집적체다. 황경수 엔지니어와 이 부분에 대해 오랜 토론과 실험을 거치며 만든 결과물이기도 하다.

청자에 따라서는 블랙홀 음악의 박진감을 이끌었던 베이스 연주가 이전보다 약화된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좀 더 귀를 기울여보면 단단한 드럼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탄탄하게 붙어있는 베이스 소리가 드럼의 타격감을 배가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Ur Fired’에서 기타 솔로 이후 등장하는 베이스 솔로처럼 따로 자리를 마련하지 않더라도 리듬악기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정병희는 “기본에 충실한, 정말 녹음다운 녹음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 드럼 트랙과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재녹음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베이스 특유의 탄력을 잃지 않도록 숱하게 스트링을 교체해가며 녹음에 임했다는 것이다. 미니멀하지만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단단한 리듬의 기초는 이렇게 드럼과 베이스로부터 시작된다.

효과를 배가시키기 위해 페이저 정도의 이펙팅 이외에는 철저하게 앰프 톤으로 만들어낸 리프는 허식이 없으면서도 연륜을 느낄 수 있는 정교한 구조로 되어 있다. 전형적인 파워메탈 리프도 아니고 블루지한 하드록 성향도 아니다. 헤비메탈의 정석에 기반 하고 있지만 뻔한 리프와는 명확히 선긋기를 하는 리프다. 기타 솔로 역시 다양한 테크닉을 자랑하지만 화려하거나 연주력을 뽐내기 위한 대목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주상균은 이에 대해 “듣기에는 편하지만 막상 카피를 시도해보면 막히는 지점이 많은 우리만의 솔로를 만들고자 했다”고 밝힌다. 나머지 절반의 솔로를 담당한 이원재는 “과거처럼 솔로 라인을 미리 짜지 않고 녹음 현장에서 순간적으로 느끼는 감정에 충실한 연주를 담고자 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주상균이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던 어머니와의 마지막 여행의 기억을 바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평행우주를 상상하며 쓴 ‘Dimention’의 솔로 녹음 과정이 그러했다. 아무런 곡에 대한 설명 없이 스튜디오에서 주상균이 만든 곡의 얼개만 듣고 이원재는 해지는 바다를 관조하는 느낌으로 솔로를 구상하며 즉흥연주를 한 것이다. 덕분에 블루지한 이원재의 솔로는 이전보다 날카로워졌고, 네오클래식 메탈의 영향이 느껴지던 주상균의 솔로에는 블루지한 정서가 흐른다. 멤버들 사이의 음악적 신뢰와 소통이 연주로 표현되는 곡들이 쏟아졌다.

이전에도 멤버 전원의 코러스가 일품인 블랙홀이었으나 이번 작품에서는 보컬 하모니가 빛을 발한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여러 성부의 소리를 켜켜이 쌓는 방식이 아니라 한 두 성부가 간략하게 더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풍성하게 느껴지는 것은 오히려 반음 차이의 단순한 화음, 혹은 서로의 목소리가 물리는 방식 등을 통해 직관적이면서도 음악적 효과를 최대로 끌어올리는 코러스의 방식을 모색한 밴드의 고민이 빚어낸 성과이다.

홀로 느닷없이 만들 수 없는 미래
미래를 이야기하고, 미래의 감각을 먼저 느껴보는 사운드가 담겨있지만, 그 소리를 만들어 낸 재료는 밴드 블랙홀이 지금까지 시도해 온 모든 음악적 장치를 해체하여 기초부터 재구성한 것이다. 미래는 갑자기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오늘의 산물임을 음악을 통해 증명하는 작업이라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앨범 후반부에 등장하는 ‘Utopia’의 가사 한 구절은 밴드 블랙홀이 앨범 [Evolution]에서 팬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단적으로 드러낸다. “은하계 너머로 가서 찾은 게 아냐 / 시간을 뒤져서 발견한 것도 아냐 / 모두의 가슴에 담겨 있었던 거야 / 희망이 이뤄낸 유토피아”
30년 전 ‘이상을 향하여’로 시작된, ‘유토피아’로 나아가기 위한 블랙홀의 멈추지 않는 음악적 열정은 지난 9월 3일 발매된 헌정앨범 [Re-Encounter the Miracle]을 통해서도 충분히 입증된다. 한국 헤비메탈 역사상 처음으로 후배 밴드와 음악인이 모여 선배의 앨범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낸 앨범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블랙홀의 30년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블랙홀은 밴드의 역사나 후배의 헌사에 자족하지 않고, [Evolution]을 통해 더 강렬하고 묵직한 희망의 미래를 만들어가고자 한다. 블랙홀의 이러한 다짐은 오는 2019년 12월 14일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 화암홀에서 열리는 30주년 기념 및 [Evolution] 발매 공연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블랙홀은 [Re-Encounter the Miracle]을 만들어 낸 후배들과 더 큰 그림의 활동 또한 기획하고 있다. 블랙홀은 알고 있다. 미래는 어느 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손잡고 차근히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과거의 아픔을 품어내고, 현재의 부조리를 비판하며, 미래의 희망을 만들어낸 밴드, 블랙홀. 30년의 시간 동안 쌓아온 내공을 이제 앨범 [Evolution]을 통해 처음부터 다시 쌓아올린다. 밴드의 진정한 진화는 과거를 무(無)화 시키지 않으면서도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순간, 시작된다. 블랙홀은 이제 알 수 없는 미래로의 진화를 시작했다. 두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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